사상 초유의 보일러 이송 작전
전쟁이 나면 위스키 산업은 초토화된다. 일단 재료부터 문제다 보리 같은 곡물이 충분해야 위스키도 만든다. 하지만 난리통에는 잉여 곡물이라는게 없다. 당장 먹을거리부너 걱정해야 하는 상황이니까. 곡물을 확보한다고 쳐도 증류 설비를 돌릴 연료도 부족하다. 나라의 모든 물자와 자원을 군수품과 생필품 제조에 써야 하니 이 역시 당연하다. 재료와 연료가 있더라도 일손이 없을 때도 있다. 직원들이 군인으로 징발돼 떠나면 위스키 만들 사람이 없어서 증류소 가동을 못한다. 그렇기에 1,2차 세계대전 중에 문 닫은 증류소가 스코틀랜드에 한 둘이 아니다.
보모어도 마찬가지였다. 2차 세계대전 중에는 거의 위스키 생산을 하지 못했다. 앞서 언급한 여러 이유도 있지만 무엇보다 증류소가 군사시설로 쓰였기 때문이다. 전쟁 기간에 영국 연안 방위대는 보모어 증류소를 군사기지로 활용했다. 당시 영국 공군은 해군 함정을 지원하고 잠수함 공격에 대비하기 위해 비행정을 대서양 연안에 띄웠다. 이 작전 계획을 보모어 증류소에서 세웠다.
나라를 위해 증류소 건물을 내준 것에 대한 보상은 20년 뒤에 받는다. 1963년 보모어를 인수한 모리슨 가문은 낡은 설비를 뜯어내고 증류소 현대화에 나섰다. 이듬해인 1964년 모리슨 보모어는 증류기와 보일러를 교체할 계획을 세운다. 석탄으로 불을 때는 직접 가열 증류시와 보일러를 철거하고 증기로 열을 전달하는 현대식 스팀 코일방식을 도입하려고 한것이다. 하지만 새 증류기와 보일러를 주문 제작한 뒤 모리슨은 고민에 빠진다.
보일러 무게가 18톤에 달할 만큼 무겁고 크기도 초대형이라 본토에서 아일라섬까지 가져올 방법이 마땅치 않았다. 당시만 해도 아일라에는 대형 페리가 오가지 않았다. 소형 선박만 들락거릴 뿐이었다. 18톤짜리 보일러를 이런 배로 싣고 올 수는 없었다. 결국 모리슨 보모어는 영국 국방부에 SOS를 쳤다. 육군 군용 트럭으로 증류기와 보일러를 해군 기지가 있는 루항구까지 보낸 다음에 해군 함정으로 아일라섬까지 배달해달라고 부탁했다. 2차 세계대전 때 신세를 진 영국 국방부는 '택배 배달' 요청을 받아들였다. 그렇게 해서 사상 초유의 영국 육해군 합동 보일러 이송 작전이 개시됐다.
증류기와 보일러를 실은 군함은 오전 9시 아일라섬 연안 근처에 도착했다. 해군 기지를 떠난 지 12시간 만이었다. 하지만 여기서 난관에 부딪친다. 예상보다 조수가 낮아서 상륙용 선박을 내릴 수 없었던 것. 영국 해군은 장기전에 돌입한다. 해안선 1마일 앞에 군함을 세우고 물때를 봐가며 상륙 시도를 이어갔다.
그러다 몇 시간 만에 증류기는 방수포를 씌워 항구에 내리는 데 성공했다. 하지만 18톤 보일러가 육지에 도착한 건 하루가 지난 다음날 오전이었다. 해군은 물이 조금 차오른 걸 확인하자마자 상륙을 시도해 성공한다. 보모어 증류소 보일러 이송 작전은 기지를 출발한 지 36시간 만에 종료됐다.
블랙 보모어의 태동
영국인은 해마다 11월 5일에 축제를 즐긴다. 가이 폭스 나이트 혹은 본 파이어 나이트로 불리는 축제다. 1605년 가이 폭스라는 카톨릭 신자가 신교도 국왕을 암살하려고 국회의사당을 폭파하려다가 실패한 사건을 기념해 불꽃놀이를 하거나 횃불을 들고 행진한다. 영국 전역이 폭죽과 불꽃에 휩싸인 1964년 11월 5일 . 아일라섬 보모어 증류소에서는 환호와 박수가 터졌다. 육해군 합동작전으로 천신만고 끝에 실어 온 증류기와 보일러가 이날 정 가동에 들어갔기 때문이다.
증류기와 보일러가 교체되면서 보모어의 스피릿은 근본적으로 달라졌다. 앞서 언급한 것처럼 석탄으로 직접 가열하지 않고 뜨거운 증기를 흘려보내는 간접 가열로 바뀌었기 때문이다. 증류소의 새로운 출발을 기념하고 기억하기 위해 보모어에서는 새 증류기와 보일러로 뽑아낸 1964년 스피릿을 특별하게 숙성하기로 한다.
스페인 헤레스의 유명 셰리 양조장 윌리엄스 앤 험버트에서 가져온 퍼스트필 올로로소 캐스크 여러 개에 이 스피릿을 채웠다. 그런 다음 보모어의 금고로 불리는 1번 숙성고에 집어 넣는다. 위스키 수집가들이 '전설'이라고 부르는 블랙 보모어가 태동한 순간이었다.
위스키에 관심 있는 분이면 블랙 보모어 예기는 한 번쯤 들어왔을 것이다. 이름에 블랙이라는 단어가 붙은 건 위스키 빛깔이 간자아처럼 새까맣기 때문이다. 올로로소 셰리 퍼스트 필에 오래 숙성하면 색이 어둡게 나오는 건 당연하다. 하지만 블랙 보모어는 블랙이라는 말을 대놓고 붙일 만큼 유난히 검고 풍미까지 독특하다. 이유가 있다. 블랙 보모어 숙성에 사용한 오크통이 일반적인 올로로소 셰리 오크통이 아니라서 그렇다. 진한 갈색을 띄는 브라운 셰리 캐스크에 숙성했기 때문이다. 구체적으로는 윌리엄스 앤 험버트에서 생산하는 월넛 브라운 셰리라는 제품이 있는데 이걸 담았던 통을 가져와서 쌌다.
블랙 보모어가 전설의 위스키가 된 데는 숙성고 영향도 컸다. '여왕의 캐스크'를 비롯해 블랙 보모어를 저장한 1번 숙성고는 해수면 아래에 있다. 숙성고 한쪽이 바다와 맞닿아 있다. 벽에 구멍을 뚫으면 바닷물이 밀려들어오게 된다. 숙성고이면서 동시에 방파제 역할을 하는 셈이다. 숙성고가 바다에 잠겨 잇는 거나 마찬가지라서 천사들이 먹어치우는 증발량은 연간 1%밖에 안된다.
숙성도 천천히 이뤄진다. 정리하면 블랙 보모어는 새 증류방식에 브라운 셰리 캐스크와 방파제 숙성고까지 세 가지가 결합해 탄생한 특별한 위스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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