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드벡의 부활
아드벡도 역사와 전통이 상당하다. 문헌 기록으로는 지금의 증류소가 있는 곳에서 최초로 위스키를 만들기 시작한게 1794년이라고 한다. 이후 1815년에 맥두걸 가문의 존 맥두걸이라는 농부가 정식 면허를 받아 증류소를 운영한다. 라프로익 편에서 설명한 것처럼 당시 아일라 땅 대부분을 갖고 있던 캠벨가문에서는 위스키 제조를 적극적으로 독려하며 증류소 설립을 도왔다.
창업 초기 아드벡은 아일라섬에서 제일 잘나가는 증류소였다. 찰스 맥클린 책에 따르면 1835년 아드벡은 일주일에 2300리터의 스피릿을 뽑아내며 아일라에서 가자 큰 생산 규모를 자랑했다. 1850년에 들어 증류소를 운영하던 알렉산더 맥두걸(창업자 존 맥두걸의 아들)이 갑자기 사망하면서 위기를 맞았지만 1870년대 스카치 유행으로 다시 전성기를 누렸다. 이 무렵 증루소 일대에서는 직원과 가족들이 사는 아드벡 마을이 형성됐다. 증류소 직원만 한때 60명에 달했고 아드벡 마을 학교에 다니는 직원직원 자녀도 100명이 넘었다고 한다.
하지만 호황은 오래가지 못했다. 20세가 들어 스카치 유행이 잠잠해지고 1차 세계대전에 이어 미국 금주법 시행같은 사건이 연달아 터지는 바람에 아드벡은 내리막길을 걷는다. 1970년대 이후부터는 인수와 합병, 그리고 가동 중단이 이어지면서 위스키를 제대로 만들어내지 못했다.
1976년 캐나다 주류 기업 하이램 워커가 아드벡을 인수했지만 5년 뒤인 1981년에 생산을 멈췄다. 1987년에는 영국계 기업 얼라이드가 증류소를 매입해 재건에 나섰다. 하지만 1989년부터 1995년까지 1년에 딱 두 달씩만 위스키를 만들었다. 그러다가 1996년에 다시 증류소 문을 닫고 만다. 이렇게 두 차례나 가동이 중단됐기에 1980년대와 1990년대 아드벡 캐스크를 찾는 건 지금 하늘의 별 따기에 가깝다.
다 죽어가던 아드벡이 부활한 건 글렌모렌지가 증류소를 매입한 1997년부터이다. 700만 파운드에 아드벡을 인수한 글렌모렌지는 140만 파운드를 더 투자해 생산 설비를 확충하고 방문자 센터를 단장한다. 그러면서 부족한 숙성고 재고를 채우려고 그동안 아드벡과 거래한 블렌디드 위스키 제조회사와 접촉해 1980년대 혹은 1990년대 초반에 생산한 아드벡 캐스크를 다시 사들였다.
1998년부터 생산을 재개한 아드벡이 컬트 위스키 위상을 갖게 된 데는 역대 매니저의 역할도 컸다. 글렌모렌지 인수 직후붜 2007년까지 증류소를 운영한 스튜어트 톰슨과 스튜어트의 뒤를 이어 2020년까지 매니저를 맡은 미키헤즈는 각종 행사난 축제에 적극 출연해 홍보에 앞장섰다.
여기에 스튜어트 톰슨의 부인으로 1997년 남편과 함께 아일라로 건너온 재키 톰슨 역시 큰 기여를 했다. 방문자 센터 운영을 총괄하면서 전 세계에서 찾아온 손님들에게 아드벡의 매력을 알렸다. 아드벡 홍보 대사는 마찬가지인 재키는 지금도 방문자 센터 매니저를 맡고 있다.
또한 13만 회원을 자랑하는 아드벡 팬클럽 '커미티'의장으로 활동하고 있다. 열정으로 똘똘 뭉친 이들의 노력으로 아드벡은 연간 180만병(2020년 매출 기준)에 달하는 판매량을 기록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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