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접 가열로 바뀐 새 증류실
증류소의 심장 증류실. 4년 동안 진행된 설비 확장으로 가장 크게 변한 곳이다. 원래 글렌피딕 증류실은 1번 증류실 1과 2번 증류실 이렇게 두 곳이다. 하지만 이걸로도 모자라 2019년 3번 증류실을 지었다. 여기에 1차 증류기 6대와 2차 증류기 10대를 추가로 설치했다. 증류실 배치도 바꿔서 옛 1번 증류실에 있던 증류기는 새로 지은 3번 증류실 옆 공간으로 옮겼다. 이로써 글렌피딕 증류소에서 가동하는 증류기는 43대로 늘어났다.
새로 지은 3번 증류실은 멋지고 깔끔하다. 한쪽에는 창이 달린 1차 증류기 6대가 일렬로 서 있다. 반대편에는 2차 증류기 10대가 마주보고 있다. 가동에 들어간 지 얼마 안 돼 증류기는 하나같이 반짝반짝 빛나고 있다. 이제 막 지은 새 아파트에 광택 나는 새 가구를 들여놓은 느낌이다. 하지만 3번 증류실을 주목해야 하는 건 단순히 새로 지어서가 아니다. 증류기를 추가 설치하면서 변화를 줬기 때문이다. 우선 증류기 크기를 키웠다. 원래 글렌피딕은 9100리터짜리 1차 증류기와 4550리터짜리 2차 증류기를 써왔다. 하지만 3번 증류실에 있는 건 1차 증류기 9500리터, 2차 증류기 5900리터짜리였다.
증류기 용량을 늘리면서 가열 방식도 바꿨다. 그동안 글렌피딕은 가스불로 증류기 밑바닥에 열을 전달하는 직접 가열방식으로 증류를 해왔다. 직접 가열은 글렌피딕과 글렌파클라스, 스프링뱅크 외에 스코틀랜드 다른 증류소에서는 거의 쓰지 않는 방식이다. 그렇기에 직접 가열은 글렌피딕 증류 공정을 설명할 때마다 등장하는 핵심 키워다. 하지만 새로 지은 3번 증류실을 달랐다. 스코틀랜드 대다수 증류소처럼 증류기 내부에 있는 관에 뜨거운 증기를 집어넣어 열을 전달하는 간접 가열로 바꿨다. 증류기 크기와 가열 방식 변화는 위스키 풍미에 영향을 주는 부분이다. 간접 가열로 뽑아낸 스피릿으로 숙성을 마쳤을 때 어떤 결과가 나올지 궁금하다.
증류기 형태가 세 가지인 이유
여전히 직접 가열 방식으로 증류하는 2번 증류실에도 들렀다. 1차 증류기 5대와 2차 증류기 10대가 배치돼 있었따. 여기 있는 증류기를 살펴보면 세 가지 형태로 나뉜다. 먼저 1차 증류기는 생김새가 양파를 닮았다고 해서 양파형으로 분류된다. 반면 2차 증류기는 두 가지를 쓴다. 하나는 증류기 목에 공처럼 생긴 보일 볼이 달려 있고 다른 하나는 랜턴처럼 생겼다고 해서 흔히 랜턴형이라고 부르는 형태다. 이렇게 증류기 형태가 세 가지나 된 건 이유가 있다. 창업자 윌리엄 그랜트가 증류소를 세울 때 카듀 증류소에서 사 온 중고 증류기가 이 세 가지 형태였기 때문이다. 그때부터 지금까지 글렌피딕은 증류기 모양을 바꾸지 않고 그대로 복제해 새 증류기를 설치해 왔다.
서양배 풍미의 비결
글렌피딕 위스키에서는 서양배 풍미가 두드러진다. 해외여행이나 출장 갔을 때 조식 뷔페에서 서양배를 먹어본 사람이라면 어떤 향과 맛인지 알 수 알 것이다. 우리나라 배보다 덜 달고 조금 심심한 편이다. 그렇다면 이런 서양배 풍미가 왜 글렌피딕에서는 잘 느껴지는 걸까? 증류소에서는 스피릿을 잘라내는 공정을 주목해서 봐야 한다고 강조한다.
이 설명을 이해하려면 미리 공부가 필요하다. 스피릿을 증류소에서 어떻게 잘라내는지부터 알아야 한다. 증류를 통해 뽑아내는 스피릿은 세 가지로 분류된다. 먼저 2차 증류 초반에 나오는 스피릿이 있다. 이걸 초류라고 한다. 메탄올 같은 유해 성분도 있어서 따로 잘라내 모아둔다. 초류를 끊어낸 뒤에는 알코올 도수가 조금 낮은 스피릿이 나온다. 이건 중류라고 부른다. 오크통에 넣고 숙성에 들어간 스피릿이 바로 이 심장 부분인 중류이다. 마지막으로 중류를 다 얻어낸 뒤에 나오는 스피릿은 후류로 분류한다. 증류 후반부에 나오는 후류, 꼬리 부분은 알코올 도수가 너무 떨어진다. 또한 대다수 증류소에서 풍미에 좋지 않은 영향을 준다며 선호하지 않는 프로판올이나 아세트산, 푸르푸랄 같은 성분도 많다. 그래서 초류와 함께 모아뒀다가 다음번 증류할 때 쓴다.
이처럼 스피릿을 세 가지로 분리해 잘라내는 작업을 증류소에선 스피릿 컷 혹은 커팅이라고 부른다. 여기서 꼭 기억해야 할 것은 초류(머리)-중류(심장)-후류(꼬리)로 삼둥분된 스피릿 가운데 오크통 숙성에 쓰는 건 오직 중류뿐이라는 사실이다. 그렇기 때문에 모든 위스키 증류소에서는 중류로 잡아낼 범위를 미리 설정해 놓는다. 일반적으로는 알코올 도수 몇 퍼센트에서 몇 퍼센트까지의 스피릿을 중류로 모을 것인지를 정해두고 증류에 들어간다. 이렇게 알코올 도수를 기준으로 정한 중류의 시작 지점과 끝 지점을 컷 포인트라고 하는데 증류소마다 제각각이다. 컷 포인트를 따라 풍미가 달라지기 때문이다.
그럼 글렌피딕은 스피릿을 어떻게 잘라낼까? 글렌피딕 증류 공정을 살펴보면 초반 30분 정도 흘러나오는 스피릿은 초류로 분류해 모아둔다. 그러면 알코올 도수가 75%(abv)정도로 내려오게 되는데 이때부터 나오는 스피릿을 중류로 모으기 시작한다. 이후 2시간 반에서 3시간 정도 중류를 확보하고 나면 알코올 도수가 65.6%/까지 떨어지게 되고 이때 중류 잡아내는 걸 멈춘다. 그 뒤로 4시간 동안 나오는 스피릿은 후류로 분류해 통에 모아놓고 초류와 함께 다음 증류 때 사용한다. 결국 글렌피딕 컷 포인트는 스피릿 전환 컷 포인트이다. 스피릿 도수 75%에서 65.6%(후류 전환 컷 포인드)이다. 스피릿 도수 75%에서 65.6%까지만 중류로 쓴다는 얘기다. 여기서 주의 깊게 봐야 할 건 글렌피딕의 컷 포인트 수치가 스코틀랜드 증류소의 일반적인 컷 포인트보다 살짝 높은 편이라는 점이다. 이렇게 컷 포인트를 조금 올려 잡아서 도수가 높은 스피릿을 중류로 뽑아내기 때문에 서양배 같은 풍미가 돋보이게 된다는 게 증류소의 설명이다.
아마 여기까지 읽고도 이해하기 어려운 분이 많은 것이다. 약간만 설명을 보탠다면 '일반적으로' 컷 포인트를 높게 가져가면 과일 풍미를 이끌어내는 에스테르 성분을 중류에 충분히 담을 수 있게 된다. 왜냐면 에스테르의 일종인 에틸 아세테이트가 증류 초반에 많이 나오기 때문이다. 정리하면 글렌피딕은 컷 포인트를 조금 높게 설정해 서양배 향이 나는 물질을 더 풍성하게 잡아낸다고 보면 된다.
글렌피딕 특유의 서양배 풍미를 단순히 컷 포인트 하나로 설명할 수는 없다. 위스키는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 발효에서 부터 숙성까지 모든 공정이 풍미에 다 영향을 준다. 증류 공정만 해도 컷 포인트 말고도 증류기 크기나 형태, 증류 속도 등 여러 변수가 존재한다. 결국 컷 포인트는 글렌피딕 풍미를 결정하는 많은 변수 가운데 한 가지 요소인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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