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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카치 위스키 이야기 "올트모어" (1)

by 주류탐험가K 2023. 11.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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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개와 이끼가 많은 곳

스트라스아일라가 있는 키스 마을에서 북쪽으로 8킬로미터쯤 올라가면 포기 모스라는 곳이 나온다. 포기 모스는 우리말로 직역하면 '안개 낀 이끼'라는 뜻이다. 언덕과 구릉으로 둘러싸인 이 일대에 안개가 유난히 자주 끼고 사방에 이끼가 자라서 이런 이름이 붙었다. 안개와 이끼가 많은 포기 모스는 19세기 초반 불법 증류 천국이었다. 옆으로  강이 흐르는 덕분에 물이 풍부했고 늘 안개에 덮여 있어 단속을 피하기에도 좋다. 

 

몰래 위스키 만드는 밀주업자한테는 짙게 낀 안개가 가림막 역할을 했던 것이다. 더구나 이 지역에는 증류기를 돌릴 때 연료로 썼던 피트(이탄)까지 널려 있어서 밀주 위스키 만들기에 더할 나위 없었다고 한다. 

 

이처럼 위스키 증류 역사가 오래된 포기 모스에 자라하고 있는 곳이 올트모어이다. 듀어스 회사가 갖고 있는 5개 몰트 증류소 가운데 하나이다. 올트모어는 과거에는 블렌디드 원액 생산에만 주력했다. 하지만 2014년부터 다양한 싱글 몰트 제품을 내놓으며 주목받고 있다. 

"버키 로드 한 잔!"

올트모어 창업자 알렉산더 에드워드는 타고난 위스키 사업가였다. 그는 벤리니스 증류소를 운영하던 아버지의 뒤를 이어 일찌감치 위스키 제조에 뛰어들었다. 알렉산더는 27살이던 1891년에 라가불린 주인인 피커 맥키와 손잡고 스페이사이드 크레이겔라키 마을에 증류소(크레이겔라키 증류소)를 세웠다. 호텔도 짓고 주민들이 함께 쓸 수 있도록 전기까지 끌어와 마을을 탈바꿈시켰다. 

 

이런 공로로 크레이겔라키 마을에는 지금도 그의 이름을 딴 에드워드 거리가 있다. 크레이겔라키에서 성공을 거둔 알렉산더는 1896년에는 아버지한테 벤리니스를 물려받은 뒤 증류소 하나를 더 짓게 되는데 그게 올트모어였다. 

 

1897년 5월부터 가동에 들어간 올트모어는 성공가도를 달린다. 위스키를 내놓자마자 블렌디드 제조업자 사이에서 '톱 클래스"로 평가받으며 주문이 밀려든다. 호평이 이어지면서 올트모어는 지역 주민한테도 큰 인기를 끌었다. 특히 항구가 있는 버커 마을 어부들이 올트모어를 사랑했다. 당시 스페이사이드 술집에 가서 "버키 로드 한 잔"이라고 외치면 그건 "올트모어 한 잔 달라"는 뜻으로 통했다. 지금도 올트모어 병 아래쪽에 버키 로드라고 적혀 있는 걸 볼 수 있는데, 바로 이런 사연에서 비롯된 것이다. 

 

너도나도 올트모어 위스키를 찾으면서 증류소에선 1년 만에 생산량을 두 배(45만 리터)로 늘렸다. 하지만 워낙 인기가 많아 공급이 수요를 쫓아가기 힘들 정도였다고 한다. 

 

크레이겔라키와 벤리니스에 이어 올트모어까지 성공시킨 알렉산더 에드워드는 1898년 오반 증류소를 사들여 사업을 확장한다. 그렇게 설립된 회사가 Oban & Aulenlivet Distilleries였다. 하지만 일이란 게 항상 잘 풀릴수는 없는 법. 스카치 산업을 붕괴 직전으로 몰고 간 패티슨 사태로 위스키 판매가 점점 줄었다. 1923년 알렉산더 에드워드는 올트모어를 비롯해 갖고 있던 증류소를 DCL(거대 주류기업 디아지오의 전신)에 넘기고 위스키 사업에서 손을 뗀다. 

 

올트모어 역사를 설명하면서 "알렉산더 에드워드야말로 진정한 영웅"이라고 말한다. 창업자 인생을 깊이 연구한 이들에 따르면 알렉산더는 능력도 뛰어나고 재산도 많았지만 늘 겸손하고 소박했다. 또 남에게 항상 베푸는 사람이기도 했다. 

 

외국산에 밀려 스코틀랜드 보리 판매가 감소하자 알렉산더 에드워드는 기금을 조성해 농부들을 도왔다. 세계대전이 터졌을 때에는 자기 집을 야전 재활병원으로 제공해 군인들이 치료받을 수 있도록 했다. 눈을 감을 때에도 공공의료를 담당하는 정부기관에 재산을 기부하고 떠났다. 이처럼 평생 나눔을 실천했지만 선행이 세상에 알려지는 것은 꺼렸다고 한다. 

진정 품위있는 인생을 산 올트모어 창업자 알랙산더 에드워드의 이야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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