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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카치 위스키 이야기 "라프로익" (3)

by 주류탐험가K 2023. 12.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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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프로익이 약으로 수출된 사연

라프로익을 처음 맛본 사람의 반응은 대개 비슷하다. 인상을 찌푸리거나 콜록콜록 기침을 하거나 심지어 코하고 싶다는 사람도 있다. 잠깐 향만 맡아도 '병원 냄새' 혹은 '소독약 냄새'가 진동하기 때문이다. 라프로익에서는 자기네 위스키에 넌더리를 내는 사람들의 반응만 모아 홍보 영상을 만들기도 했다. 그렇지만 희한한게 있다. 처음에 질색을 하던 이들 중에 몇몇은 특유의 향과 맛에 빠져 마니아가 된다는 사실이다. 중독성이 강해 한번 맛들이고 나면 계속 찾게 된다. 그래서 나온 말이 "Love or Hate", '아주 좋아하거나 아니면 증오하거나'라는 문구이다. 

 

라프로익이 소독약 같은 풍미를 지닌 까닭에 미국 금주법 시기에 희한한 일도 일어난다. 위스키 같은 증류주가 오랜 세월 의약품과 치료제 역할을 했다는걸 보면 실제로 중세 유럽인은 위스키 한 모금에 몸이 후끈 달아오르는 걸 보면서 놀라운 치유 능력이 있다고 생각한다. 

 

아스피린이나 타이레놀이 없던 시절, 유럽인은 위스키 같은 증류주로 거의 모든 질병을 치료할 수 있다고 학신했다. '생명의 물' 위스키를 얼마나 대단한 약으로 생각했는지 보여주는 기록은 많다. 예를 들어 스코틀랜드 시인 제임스 호그는 "위스키를 꾸준히 마시면 죽지 않고 영원히 살 수 있다. 의사나 묘지도 덧없어진다"라는 말을 남겼다. 이런 믿은 때문에 16세기까지 위스키는 대부분 의료용으로 소비됐다. 마시는 술이기에 앞서 환자한테 처방하는 엄연한 의약품이었다. 

 

위스키가 생명의 물이라은 인식은 미국에서도 마찬가지였다. 20세기 초반까지 미국에서는 위스키를 정식 약으로 처방했다. 감기나 근육통은 물론 변비나 설사, 심지어 치질 환자한테도 위스키를 권했다 당시 미국 신문 광고를 보면 "위스키를 마시면 건갱해진다"라거나 "위스키로 400만 명을 치료했다"는 문구도 눈에 띈다. 이렇다보니 1920년 금주법을 시행하면서도 미국 정부는 약으로 정식 처방되는 위스키만큼은 막을 수가 없었다. 미국 술꾼들은 금주법 기간에도 병원에서 처방만 받으면 열흘마다 0.5리터의 위스키를 합법적으로 마실 수 있었다. 

 

이런 금주법의 허점을 파고든 게 라프로익이었다. 피터 맥키와의 전쟁에서 완승을 거두고 매니저에서 사장이 된 이언 헌터는 금주법이 시행되자 미국으로 건너간다. 그는 라프로익 위스키를 미국 세관 직원에게 건네며 의약품 반입 허가를 신청한다. 세관 직원은 처음엔 안 된다고 했지만 이언 헌터의 권유로 라프로익 향을 맡아보더니 "약이 분명하다"라며 허가를 내준다. 미국 수출길이 막혀 스코틀랜드 여러 증류소가 쓰러지던 상황에서 라프로익은 이같은 기발한 아이디어로 매출 신기록을 세웠다. 

이언 헌터와 베시 윌리엄슨

최근 라프로익에서 1년에 하나씩 내놓는 한정판 제품이 있다. 이언 헌터 스토리시리즈이다. 2019년 선보인 시리즈 1과 2020년에 나온 시리즈 2즌 2022년에 공개된 시리즈 4는 34년 숙성이었다. 비싸고 희귀한 이언 헌터 스토리는 제품 포장도 특별하다. 두툼한 양장본 책처럼 된 상자에 위스키가 담겨 있다. 이 시리즈를 구매한 이들은 "책을 샀더니 위스키를 덤으로 끼워준다"는 우스갯소리를 하기도 한다. 

 

이렇게 특별한 제품에 이름이 남아 있는 이언 헌터는 라프로익 역사에서 가장 큰 업적을 남긴 인물로 평가된다. 앞서 본 것처럼 그는 남들이 다 망해가던 금주법 시기에 미국 수출길을 뚫어 활로를 찾았다. 또한 캐스크 숙성 방식을 바꾸고 증류소도 대대적으로 확장했다. 무엇보다 임대료를 내고 빌려서 사용해온 증류소 부지와 농장을 매입하고 친척들 지분까지 사들여 라프로익을 온전히 자기 소유로 만들었다. 

 

라프로익 입지가 탄탄해지던 시기에 이언 헌터가 '단기 알바'로 뽑은 여성이 있다. 문서 타이핑을 도와줄 임시 직원을 뽑는다는 광고를 보고 지원한 베시 윌리엄슨이었다 합격 통보를 받고 아일라섬에 건너올 때 베시는 작은 옷가방 하나만 딸랑 챙겼다. 임시직 고용 계약 기간이 딱 석 달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석 달은 베시의 운명을 완전히 뒤바꿔 놓는다. 이언 헌터가 능력이 출중한 베시를 후계자로 점찍었기 때문이다. 이언 헌터는 베시를 정식 직원으로 고용하고 증류소 운영에 필요한 지식과 기술을 전수했다. 

 

그리고 1954년 세상을 떠나면서 자신이 평생 일군 라프로익 증류소를 베시에게 넘겨준다. 당시 작성된 유언장을 보면, 이언 헌터는 10년 이상 증류소에서 일한 직원들에게 100파운드를 물려줬다. 하지만 이걸 제외한 모든 재산은 베시에게 돌아갔다 증류소는 물론이고 대저택과 포트 엘런 앞바다에 있는 작은 섬, 현금 5000파운드까지 베시의 몫이 됐다. 이로써 베시는 19세기 카듀 증류소를 운영한 엘리자베스 커밍에 이어 스카치 역사상 두번째로 여성 증류소 CEO가 됐다. 

 

3개월 단기 알바로 출발해 사장이 된 베시는 따뜻한 마음을 지닌 인물이었다. 자선사업을 적극적으로 펼치고 직원 복지에도 신경을 썼다. 그녀의 됨됨이가 얼마나 훌륭했는지 보여주는 일화는 많다. 월급날 술값으로 생활비를 날린 직원한테 슬쩍 돈을 챙겨줬는가 하면 정년이 지난 직원을 계속 고용해 생계유지를 돕기도 했다. 

 

또 증류소 직원들에게 위스키 몇 잔을 매일 공짜로 나눠주는 드래밍 전통도 베시가 사장으로 있는 동안 그대로 유지됐다. 

 

하지만 직원들에게 사랑받던 베시에게도 어려움이 찾아왔다. 교체해야하는 설비는 점점 늘어나는데 여윳돈이 없었던 것이다. 아마 이 대목에서 이언 헌터의 막대한 유산을 물려받았는데 왜 돈 걱정을 했을까 싶은 분도 있을 것이다. 바로 상속세 때문이었다. 자산가치가 높은 증류소를 물려받으며 배시는 상속세를 엄청나게 물었다. 그 바람에 당장 수중에는 현금이 없었다. 결국 베시는 증류소 보수와 증설을 위해 자기 지분 일부를 미국 기업 셴리에 넘겨야 했다. 1970년에는 셴리가 베시의 나머지 지분까지 사들여 라프로익의 주인이 된다. 이후 라프로익은 여러 기업의 손을 거쳐 지금은 산토리 자회사 빔 산토리에 소속돼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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