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트 엘런 몰트
라가불린은 주차장 옆에 대피 공간이 있다. 증류소에는 화재경보가 종종 울린다는 얘기가 있다. 꼭 연기가 나지 않더라도 이상한 낌새가 감지되면 센서가 민감하게 작동하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화재경보가 울려도 증류소에선 긴장한 모습이 없다. 늘 겪는 일이라는 듯 태연하게 팔짱을 끼고 "잠시 기다리면 곧 꺼질 것"이라고 말한다.
몰트를 건조할 때 쓰던 가마를 보면 이 가마는 거의 50년째 가동되지 않고 있다. 1974년에 플로어 몰팅을 중단하면서 몰트를 말리는 가마도 가동을 멈췄다. 라가불린은 산업유산이 된 가마를 없애지 않고 방문객한테 보여주며 몰트 제조 과정을 설명한다.
라가불린이 1974년에 플로어 몰팅을 중단한 건 바로 이해부터 근처에 있는 포트 엘런 몰팅에서 몰트 생산을 시작했기 때문이다. 그때부터 지금까지 라가불린은 같은 회사(디아지오) 소속인 포트 엘런에서 생산한 몰트로 위스키를 만든다. 컴퓨터로 제어되는 기계식 몰팅 장비를 갖춘 포트 엘런에서는 뜨거운 바람으로 몰트를 말린 뒤에 아일라섬 피트를 태워 향을 입힌다.
라가불린이나 쿨일라같은 디아지오 산하 증류소 말고도 포트 엘런 몰트를 쓰는 아일라 증류소는 여러 곳이다. 우선 '킬달튼 삼총사' 중에서 라가불린과 아드벡은 100%포트 엘런 몰트로 위스키를 만든다. 자체 플로어 몰팅을 하는 라프로익 역시 전체 사용 몰트의 80%를 포트 엘런에서 가져온다.
이렇게 세 곳 모두 같은 포트 엘런 몰트를 쓰지만 피트 처리 정도는 제각각이다. 라프로익에서 사용하는 포트 엘런 몰트는 페놀 수치가 40~45ppm이고 아드벡은 50ppm이상이다. 반면 라가불린은 34~38ppm(평균36)으로 셋 중에서 가장 낮다. 라가불린 피트 향이 아드벡이나 라프로익에 비해 은은한 것은 이런 영향이 크다.
급격히 꺾인 증류기 라인 암
라가불린 역시 빨간색 포르테우스 제분기를 쓰고 있었다. 이 구식 제분기로 일주일에 몰트 120톤을 분쇄해 위스키를 만든다. 분쇄한 몰트에서 당분을 뽑아내는 당화 공정은 4.4톤짜리 풀 라우터 방식 당화조로 한다. 발효조 10개는 모두 나무 재질이다. 한 번 발효할 때마다 액상 효모 100리터를 쓰고 발효는 평균 55시간에 끝낸다.
라가불린 증류실에 들어가면 유리창이 달린 1차 증류기 2대와 2차 증류기 2대가 보인다. 1,2차 증류기 모두 양파형이다. 일반적인 양파형에 비해 아래는 더 뚱뚱하고 위는 뾰족해서 서양배 모양이라고 표현하는 사람도 많다. 용량은 1차 증류기 1만 500리터, 2차 증류기 1만 2200리터로 2차 증류기가 오히려 더 크다. 라가불린 증류기에서 유난히 눈에 띄는 건 라인 암(증류관) 각도이다.
1,2차 증류기 모두 라인 암이 아래로 꺾인 형태이다. 특히 1차 증류기 라인 암은 매우 가파르게 급강하한다. 그렇다면 이런 형태의 라인 암은 라가불린 스피릿에 어떤 영향을 줄까?
증류기와 응축기(콘덴서)를 연결하는 라인 암은 단순히 알코올 증기가 지나가는 통로가 아니다. 라인 암을 통과하는 동안에도 일부 알코올 증기는 구리와 접촉하며 액체로 응축되기도 한다. 그렇기에 라인 암이 위를 향하고 있으면 알코올 증기에서 응축된 액체가 콘덴서로 넘어가지 못하고 증류기 쪽으로 떨어져 다시 증류된다. 반대로 라인 암이 아래를 향하고 있으면 응축된 액체게 콘덴서 쪽으로 쉽게 흘러들어간다. 다시말해 라인 암이 상향이면 대체적으로 환류가 증가하면서 스피릿이 가벼운 풍미를 갖게 된다. 반대로 하향이면 상향 라인 암에 비해 환류가 줄어들어 풍미가 보다 묵직해진다. 물론 그렇다고 '상향 라인암 = 가벼운 스피릿' '하양 라인암 = 묵직한 스피릿'이런 식으로 단순화해서 생각하면 안된다. 라인 암 각도는 스피릿 풍미를 결정하는 수많은 변수 중의 하나에 불과하다. 증류기 형태나 크기는 물론이고 증류 속도와 컷포인트에 이르기까지 여러 가지가 풍미에 영향을 준다. 증류는 일차방정식이 아니라 매우 복잡한 고차방정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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